중세 정치신학에서 현대 국제질서로 

최형화

질서와 신학

본편에서는 윌리엄 베인(William Bain)의 2020년 저서 “국제질서의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international order)에 대해 소개한다. 무신론자인 필자의 입장에서 ‘현대 국제질서는 중세 정치신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이 책의 기본전제는 다소 생소하고 이질적인 시각이지만, 기존의 편협한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좋은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저자 Bain의 논의가 국제질서의 ‘뿌리’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Bain은 국제질서를 이론화하는데 있어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접근법들은 사실 신학적 패턴을 세속적으로 적용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들 접근법은 아주 흔한 신화 이야기의 지배를 받으며, 현대국가시스템을 중세 기독교의 붕괴에서 나온 세속적인 배치로 묘사하는데, Bain은 이와 같은 국제질서 이론화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을 다룬다. 첫째, 정치신학이 탐구적 수단으로서 사용될 때 어떤 전제를 수반하는지, 그리고 정치신학이 추구하는 지식의 종류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저자는 신학과 종교를 엄격히 구분하며, 이 책은 신학 저작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신학적 개념과 범주에서 국제질서의 개념을 고찰한다. 둘째, 이 책의 목적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중세 후기와 근대 초기의 사상 전통으로부터 국제질서에 대한 현대적 사고를 형성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그는 국제질서의 전제조건을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국제질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정, 주장, 정당성에 대해 탐구한다. 셋째, 국제질서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재배치할지에 대해 논의함과 더불어, 현대국제사상에서 신학의 위치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제기한다. 

질서의 경쟁적인 개념 – 내재적 질서(Immanent Order) vs. 부여된 질서(Imposed Order)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바 있다. 그리스 철학을 ‘아테네’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예루살렘’으로 비유해서 두 사상이 서로 상관없음을 주장하는 발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성과 신앙이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Bain은 테르툴리아누스가 제기한 질문을 근거로, 질서에 대한 두 가지 경쟁적 개념 – ‘내재적 질서’(immanent order)와 ‘부여된 질서’(imposed order)에 대해 설명한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정치신학으로 현대국제질서이론을 해석함에 있어서의 근간이 된다.

‘내재적 질서’는 아테네(이성)와 예루살렘(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사상으로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자연 법칙, 절대적인 도덕성, 신의 명령에 뿌리를 둔 질서를 의미한다. 이는 상호 연결된 사물의 본성은 상호 연결된 전체를 공동으로 구성한다는 내적 관계의 교리를 전제로 한다. 이에 관한 지식은 효율적 원인(efficient cause)과 궁극적 원인(final cause)을 조사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효율적 원인과 궁극적 원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에서 비롯된다.) 내재적 질서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신(데미우르고스)은 우주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우주는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이다. 우주는 완벽한 부분으로 구성된 완벽한 전체이다.

반면 ‘부여된 질서’는 예루살렘(신앙)에 초점을 맞춘 사상이다. 이는 외부 관계의 교리에 근거하며, 인간이 만든 우연한 질서, 인간 중심적인 우주를 의미한다.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는 개체들은 법률이나 비인격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이며, 외부에서 부과되는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그리고 그 패턴에 대한 지식은 경험적 관찰과 효율적 원인의 조사에 의해 습득할 수 있다. 부여된 질서에서 신은 전지전능한 자연의 존재이며, 신은 이성이 아닌 의지에 의해 우주를 창조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개인주의, 자유, 의지, 우발성을 수반한다. 

구조적 현실주의의 정치신학

Bain은 월츠(Waltz)의 구조적 현실주의가 사실은 정치신학을 근거로 전개된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그는 자연상태에서 국가가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재한다는 구조적 현실주의의 주장은 결국 ‘부여된 질서’의 명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국가의 자유와 국가시스템의 규칙적 질서를 조화시키는 것은 신학에서 신의 자유와 자연의 규칙적 질서를 조화시키는 것의 정치적 유사체이다. 초기의 현대정치사상은 정치시스템의 작동을 비인격적인 기계와 비교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 메타포의 원형은 인간의 창조적 활동과 신의 창조적 활동 사이의 유사성에서 발견된다.(예를 들면 홉스는 인간은 신이 의지와 계략을 통해 세상을 만들고 통치하는 방식을 모방함으로써 인위적인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메타포는 기계적인 힘의 균형에 의해 조직된 자율 시스템의 관점에서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신은 이와 같은 시스템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 설명하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않지만, 기계적 메타포의 사용이 무너지지 않도록 신학적 형태의 논쟁 구조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명목주의를 표방하는 현대국제질서이론을 신과 연결지어 사고하는 패턴을 검토하면 신학, 철학, 과학, 정치를 별개로 존재하면서도 서로 얽혀있는 실타래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실타래는 결국 전지전능하고 완전히 자유로운 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월츠의 구조적 현실주의 역시 이와 같은 신학적 근거에 입각한 해석이 가능하다.

결론

책의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에 정치신학을 되짚어 보는 작업은 중세 및 근대 초기의 선조들에 대한 이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중세 신앙과 현대 세속주의의 논쟁에서 세속주의가 승리했다는 일방적인 이야기를 바로 잡는 것은 국제질서의 현대적 사고에서 신학의 중요성을 재배치한다. Bain은 멀지 않아 인류의 신학적 유산이 풀리기 시작하는 시기가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질서의 규칙성을 보정하기 위해 더 이상 신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국제정치이론가들은 신을 언급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선입견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신을 대신할 믿음, 즉 일종의 ‘검증할 수 없는 믿음'(unverifiable belief)을 찾는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편협한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인간 번영의 초월적인 선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신에 대한 믿음이 특정 질서 패턴의 목적을 알려주는 전제의 역할을 했지만, 세속적 세계에서 인간이 신을 대신하면서 검증할 수 없는 믿음이 그 전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우주에 질서를 부여한 것처럼 국제질서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 달리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가 아니라 조건부로 선하기 때문에, 국제질서의 규칙성을 임의의 변덕스러운 권력에 노출시키는 불확실성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정치신학은 명목주의자들의 자유에 대한 집착과 질서에 대한 요구를 조화시키려 애쓰면서 인간의 결정이 신을 대신할 때 생기는 이질감에 대해 조명할 수 있다.

논평

Bain은 현대국제질서이론에 더 나은 지적 역사를 제공하기 위해 역사사회학의 시각에서 중세기 신학과 현대국제질서 간의 연속성을 발굴한다. 그는 중세 신학의 근간이었던 ‘내재적 질서’와 ‘부여된 질서’ 사이의 논쟁이 현대까지 이전되어 여전히 국제질서의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Bain의 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오컴의 윌리엄 등 인물의 철학 및 신학 사상을 기반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가 IR 연구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 혹은 논쟁을 현대국제질서이론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재고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이와 같은 Bain의 취지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Bain은 온전히 서구에서 기원된 철학적, 신학적 사상에 의해 국제질서이론을 재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Bain의 이러한 논의는 시간적 스펙트럼 (고대–중세-근대)에서는 충분히 유의미한 논의가 될 수 있겠지만, 과연 공간적 스펙트럼(서구와 비서구)에서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Bain의 논의가 ‘서구 중심적’이라는 비판적 시각을 넘어서, 비서구를 포괄하는 국제질서이론을 재확립함에 있어서 서구의 신학적 역사를 고찰하는 작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둘째, 중세시대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논리에서 이성과 신앙의 분리로, 그리고 신앙에서 독립된 이성이 물리적 세계를 관찰하고 탐구하는 역할로 전환되기까지의 지식 연대기는 역사의 변천과 구분되어 논의될 수 없다. 지식의 연대기는 역사적 흐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시대의 특성에 맞게 주류담론이 형성된다고 전제한다면, 현재의 시점에서 정치신학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과연 이 시대의 어떤 흐름과 맞물리는가? Bain은 멀지 않아 신학적 유산이 풀리기 시작하는 시기가 다가올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참고문헌

Bain, William. 2020. Political theology of international order (Oxford, United Kingdom New York, 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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