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Big Question을 던지는 학과야”: 존스홉킨스 대학 박사과정 이야기

가은

“우리는 Big question(거대한 질문)을 던지는 학과야😉”

존스홉킨스 대학교의 정치학과는 미국에서 몇 곳 남지 않은, ‘이론, 사상, 질적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곳입니다. IR(국제정치)의 경우에도, Critical IR(비판이론)이 오히려 주를 차지하는, 미국에서 많이 잡아 두세 군데 남은 학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한 교수님은 우리 학교가 비판이론의 마지막 보루라서, 비판이론을 하는 지원자들은 합격하고 다른 학교를 선택할 걱정 없이 뽑을 수 있다고 자랑하시더라구요. 특히 IR에서 탈식민주의, 신유물론, 위계(Hierarchy)와 제국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존스홉킨스 대학교를 꼭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심지어 대학원 과정에서 양적연구 수업은 거의 열리지도 않아서, 양적방법론을 사용하고 싶은 몇 안되는 학생들은 교육학과나 사회학과 등 다른 학과의 수업을 수강합니다. 이런 점이 다른 학교의 정외과 분들이 보기에는 정말 독특하다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양적연구나 방법론이 주를 이루는 최근의 미국의 정치외교학 트렌드와 맞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존스홉킨스 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런저런 포닥이나 정년트랙 (tenure-track: 입사 5-7년 후 정년심사 기회가 보장되는 조건)의 교수자리를 잘 찾아갑니다. 특히, 지역학(동아시아학, 라틴아메리카학)이나 다른 인접학과(인류학, 사학, 사회학, 법학) 또는 융합학과(글로벌학, 인종차별학, 시민학 등) 등의 연계를 통해 더 넓은 범위에서 취업을 노릴 수 있는 것은 질적연구, 그리고 이론을 강조하는 존스홉킨스 정치학과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곳의 교수님들은 세부전공 할 것 없이 “우리는 Big Question을 던지는 학과”라고 자랑을 하십니다. 이는 즉, 우리는 방법론(혹은 특정 데이터)이 연구질문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더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세부전공(subfield)의 구분과 중요성

미국의 정치학 박사과정의 전반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아이알살롱 연재 코너에 다른학교 출신의 필진, 기고자 분들이 많이 다루어 주셨으니, 저는 중언을 방지하기 위해 존스홉킨스 대학교의 특징을 위주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우선, 앞서 말했듯, 존스홉킨스 대학교는 양적연구나 양적방법론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학과입니다. 그래서, 방법론을 세부전공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많은 대학들과 달리 이곳의 세부전공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 정치이론 (Political Theory): 정치이론/이론가, 인종정치, 환경정치 등
  • 미국정치 (American Politics): 미국의 정치발전, 의회/대통령제, 인종갈등 등
  • 비교정치 (Comparative Politics): 민주주의/권위주의 정권, 지역학, 정치경제 등
  • 국제정치 (International Relations): 전쟁, 안보, 지구정치, 정보, 위계질서 등
  • *법과 정치 (Law and Politics) [부전공으로만 선택가능]
  • *인종정치 (Racial Politics) [입학 quota가 주어지나, 사실상 별개의 전공은 아님]

저는 사실 대학원 원서를 쓸 때 세부전공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학교마다 대충 비교정치나 국제정치로 더 ‘합격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학과를 지망해서 원서를 썼는데요, 막상 입학해보니까 적어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는 입시 체제 자체가 각 세부전공별로 인원을 선발하는 방식이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세부전공에 지원하는지는 꽤 중요합니다.

다만, 입학후에는 세부전공이나 지도교수를 바꿀 수 있고 (실제로 바꾸는 학생들이 매년 나옵니다), 본전공이 아닌 부전공 하나를 무조건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지원하는 세부전공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잡마켓(취업시장)에서는 대부분 본전공과 부전공 할 것 없이 모두 지원하기 때문에 전공 구분보다는 본인이 입학 후 어떤 학문(들)에 기여하고 싶은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어차피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을 텐데….”

서울사람인 제가 뉴욕에 있는 한 대학원과, 치안이 안 좋기로 소문난 이곳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대학교 중 어느 곳으로 진학할지 고민하던 차에, 한 교수님이 저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시간은 도서관에서 보내게 될 테니, 학교의 위치보다는 연구적합성(fit)이 맞는 학교를 선택하세요.”

결과적으로 교수님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대학이 위치한 지역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존스홉킨스 대학교가 위치한 볼티모어는 워싱턴 DC에서 1시간정도 떨어진 도시로, DC에 비해 집세가 절반정도 저렴하고, 공항도 가깝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은 오랜 차별 정책으로 인해 인종갈등이 심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환경은 학교의 인종갈등 및 차별 연구, 시민사회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해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강도나 차량절도 등의 범죄에 대한 소식을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 한국과는 달리 24시간 열려 있는 카페가 거의 없고, 문화생활도 제한적입니다.

저는 이제 약 2년간 살다 보니 볼티모어만의 매력을 찾기도 하고,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보드게임 모임(을 빙자한 술 모임)을 가지며 정 붙일 곳을 찾긴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의 주변환경은 생각보다 우리의 생활, 기분, 심지어는 연구주제와 성과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거라는 교수님의 말씀은 사실이었습니다. 다른 미국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박사과정은 (1) 코스웍(수업수강), (2) 논문자격시험 준비, (3) 논문계획발표(Prospectus), (4) 현지조사 및 연구, (5) 졸업논문 작성의 다섯 단계로 구분이 됩니다. 이중에서 현지조사나 연구를 하는 몇 학기를 제외하고는 코스웍이나 논자시처럼 비자발적으로 끝없이 논문을 읽거나, 논문계획이나 학위논문작성처럼 자발적으로 끝없이 논문이나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니까 도서관에 틀어박히게 되죠.

5년 안에 졸업하고 취업시장에 나간다고 가정하면 이상적인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바라는) 타임라인은 대충 이런 모습입니다.

존스홉킨스 대학교 정치학과는 다른 학교나 학과에 비해서 조교(=노동) 의무가 적은 편입니다. 그래서 이곳의 박사생들은 첫해에는 조교업무가 면제되고, 이후 2년차부터는 두 학기 중 한학기 씩 수업조교를 맡게 됩니다. 조교 수요가 공급보다 적은 경우, 운이 좋으면 조교를 안하고 넘어가는 해도 있을 수 있고요.

이외에도 다른 필진들이 말씀하셨듯, 이런저런 학과의 행사에 참여하거나, 소모임에 참여하고, 따로 시간을 들여서 학술회의나 저널에 기고할 원고도 작성해야 합니다. 또, 집 청소와 빨래도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주지 않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자기주도 학습’이 진짜로 필요한 건 대학원생일 것입니다.

“즐겁지 않다면, 다른 직업을 찾아라.”

지금 저는 이주/이민 연구를 하고 있지만, 저 또한 많은 정외과 학생들처럼 “밀덕”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기나 군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군사학에 대한 관심이었는데, 학부 과정 중에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기로 결정한 후, 충동적으로 수강신청한 “Military Strategy(전술학)” 수업을 통해 이러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이 수업을 통해 군사전략의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서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또 분단국가 출신이기 때문에 가진 ‘관점’이 매우 다르고, 이런 점들이 저를 학자로서 매력적이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학부에서는 사학을 기반으로 한 지역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나라서 제시할 수 있는 이론과 대안. ‘내가’ 하는 말이기 때문에 들어주는 사람들. 이런 것들에 매료되어서 저는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결국 이렇게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굳이 밀덕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다른 이유에서 입니다. 전술학 교수님이 독일을 통일한 천재 전술가, 비스마르크(Bismarck)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비스마르크가 이런 말을 했다고요. “나는 평생 행복했던 적이 없다. 평생동안 행복했던 시간을 모아보면 채 5분이 되지 않는다.” 저는 당시에도, 지금도 저 말을 생각하면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분입니다. 역사책, 전술책, 외교학책의 첫 챕터에 항상 등장할 만큼 엄청난 업적을 세운 비스마르크가 정작 본인은 행복한 적이 없었다니요. 자연히 생각은 ‘나는 비스마르크처럼 살고 싶지 않다’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무리 죽어서, 또는 살아있는 동안 사람들이 내 업적이나 연구를 칭찬해주고, 인정해주더라도 그 과정에서 내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나는 지금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나?” 제가 박사과정을 지원하면서, 그리고 계속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온 부분입니다. 적성에 맞지 않더라도 2년만 눈 딱 감고 ‘버티면’ 학위를 받을 수 있는 (한국에서의) 석사과정과는 달리, 미국의 박사과정은 최소 5년, 길게는 7년 이상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해야 합니다. 5년! 학부도 4년밖에 안 다녔는데 말이죠. 한두 해가 아니기 때문에 박사학위가 주는 명예, 혹은 박사학위 이후의 삶 만을 바라보면서 버틴다면 온갖 신체적, 정신적 질병만 얻게 되기 십상입니다.

다행히 저는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의 연구에 대해서 토론하고, 조교로서 수업을 진행하고, 장보고 요리하고, 도서관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과정 자체가 아직까지는 재미있습니다. 심지어 책 읽고 글이나 쓰는, 백수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데 돈까지 받는다니! 물론, 모든 부분이 재미있지는 않고, 스트레스로 번아웃이 올 뻔한 학기도 있고, 미래에 대한 고민때문에 막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서 이것저것 읽고, 발표하고, 글을 쓸 때 신이 납니다.

놀랍게도, 이곳의 교수님들도 말씀하시는 방식은 각자 다르지만, 항상 비슷한 조언을 해주십니다. 한 교수님은 “너희들이 살면서 돈을 벌 수 있는, 혹은 행복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이 단 한가지라도 있다면 그걸 해라. 정치학은 돈을 많이 버는 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읽는게 즐겁지 않으면 다른 직업을 찾아라. 가르치는 게 즐겁지 않으면 다른 직업을 찾아라. 안 풀리는 문제 붙잡고 고민하는 게 즐겁지 않으면 다른 직업을 찾아라(이하 생략)” 라고도 하셨습니다.

어떤 교수님은 “잡마켓에서 어떤 주제가 잘 먹힐지 고민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잡마켓은 매년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네가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도 이 주제를 연구할 수 있다니 즐겁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셨고요.

반면 또 다른 교수님은 “나의 원동력은 ‘열받음(Spite)’이다. 자타공인 저명한 학자들의 멍청함을 증명하겠다는 의지가 나를 매일 아침 일어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말을 듣고 저도 ‘이게 맞나?’ 하고 갸우뚱 하긴 했지만, 결국 나 스스로가 이 일(조교, 연구, 네트위킹 등)을 하고싶은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맥락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길어졌지만, 결국 박사과정 진학을 고민하며 아이알살롱에 들어와 우연히 이 글에 도착한 여러분들께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박사과정의 결과가 아닌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없을 것 같다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확실하지 않다면 우선 진학 후 중간에 용감하게 포기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이 과정이 재밌을 것 같다면, 꼭 지원해보세요! 어느 쪽이든 여러분의 선택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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