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20세기 초, 서구 유럽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다는 부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기대는 세상이 기존의 내셔널리즘을 넘어 색다른 인터내셔널리즘(internationalism), 즉 국제주의의 물결로 가득할 것이라는 희망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추상적인 이념이나 상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교통수단, 통신의 발달, 그리고 새로운 공적 공간들의 등장과 같은 물리적 변화로 인해 사람들은 국제주의–혹은 국제성(internationality)-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국제화되는 세상에 대한 자각이 높아졌다.
그동안 20세기 초와 전간기(interwar period)의 “국제주의” 운동에 관한 연구는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학계에서는 쉽게 간과되거나 단순히 이상주의의 실패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추세이다. 이는 처음으로 “국제”라는 개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하고, 새로운 지역·문화와 본격적으로 만나고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20세기 초 서유럽 사람들의 경험이 어떻게 지금 우리의 국제적 교류, 제도, 규범의 개념·담론적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역사학자 글랜다 슬루가(Glenda Sluga)의 연구들이 있는데, 이 글은 특히 그녀의 20세기 초 국제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사상적 논의들을 탐구해보며, 당시 모더니티와 진보 개념이 내재한 인종주의, 제국주의, 국가주의적 요소들이 어떻게 국제주의 담론과 연결되었는지 살펴본다.
20세기 국가주의의 등장
1910년, 프랑스 리옹에서 국제주의를 주제로 논문을 낸 끌라베호(Claveirole)는 “내가 10상팀을 내고 도장 찍힌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며칠 만에 다른 대륙에 도착한다”와 같은 현상들 덕분에 새로운 국제주의 물결을 실감한다고 했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 각종 국제기구가 폭발적으로 탄생했고, 그 기구들은 우편, 전신, 관세, 위생, 보건 등과 같은 주제들로 조직되며 일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당대 사람들이 실제로 체감하고 자각했던 국제주의의 객관적, 현실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동시에 국제주의, 그리고 국제주의와 내셔널리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개념적 논쟁도 점차 활발해졌다. 국제주의가 무엇인지, “국제적 삶(international life)”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질문되었고, 이 논쟁을 통해 사람들은 이 세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being in the world)을 토론하고 상상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국제주의적 사고방식이 어떻게 실질적인 제도로 구현되고 집행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들은 국제주의로 인해 등장한 새로운 주제, 행위자, 그리고 규범은 무엇인지 질문했고, 미래의 “국제 정부”를 구상하며 행정적으로 국가와 국가주의는 어떻게 연결시킬지 고민했다.
이 논의 속에서 국제주의는 결코 내셔널리즘(nationalism), 국가주의와 구분되진 못했다. 당시 증기기관, 전기, 무역의 발달 등과 같은 객관적 사실들이 국제화 현상을 입증해줬지만, 이전에는 서로 연결될 수 없던 지역들을 포괄하기 시작한 국제주의의 틀은 결국 국가 공동체들의 연결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루이센(Ruyssen)과 같은 사람들은 국가의 자원을 자본화하는 방식이 “인류라는 종교”와 결합될 때 (신비한)국제주의를 효과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초기 국제주의를 둘러싼 논쟁들은 대부분 모더니티의 모호함과 모순성을 기반으로 했지만, 국제주의가 더 명확히 정의되는 과정에서 급진적이고 환영 받지 못하는 사상, 사람, 정치관들은 배제되기 시작했다. 국제주의의 개념은 점점 자유주의적 국민국가(liberal nation-state)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좁혀졌고, 당시 만연했던 계급적, 인종적, 젠더적 편견들과 편협한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내포하게 됐다.
국제주의의 재발명
러시아 황제의 제안으로 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와 이를 둘러싼 논의들은 당시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국제주의에 대해 폭발적인 관심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1899년에 1차 회의가 열린 헤이그에서는 제국들의 군사 및 무기 경쟁을 중단시키고, 외교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고자 했다. 회의의 영향력은 국제 사회 곳곳으로 널리 확장되었고, 국제제도와 국제법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고 전쟁에 관한 규제들을 구체화 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국제주의 논의에는 여러 사상적 배경을 가진 사람 혹은 단체들이 참여했고, 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 개념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며 발달했다. 세계 교회주의자(ecumenicalist)들은 기독교 신앙에 따라 국제주의를 받아들이고, 평화주의(pacifism)나 보편적 도덕관과 국제주의를 연결시켰다. 프레만틀(Fremantle)과 같은 사람들은 국가적 시민권, 애국심, 국민의 정치적·법적 권리와 국제주의가 양립 가능한지 물으며 자신의 국제적, 국가적, 그리고 제국주의적 정체성을 교차적으로 고민했다. 중산층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가 국가 공동체와 국제 공동체 중 어디서 보장 받는지 고민하며 국제단체들을 세워갔다. 이 시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속, 정체성, 그리고 권리의 기반에 대한 유연한 상상과 횡단적 이해가 섞이고 심화되어 폭발적으로 표현되던 시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인종차별과 식민지 문제를 다루던 사람들에게도 국제주의는 중요한 주제였다. 당시 국제주의를 논하던 주류 담론은 여전히 서구 중심적이고 계몽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의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군축이나 갈등 해결에 대한 논의가 식민지배와 서구의 보호가 필요한 인종(subject races)을 상정하고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대다수의 사회 운동가들의 평화주의적 활동 역시 (기독교)영성, 제국주의, 그리고 서구 국제법의 적용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 위에서 실행되었다. 헤이그 회의 참석자들에 의해 쓰인 “온 인류의 유대(bonds of humanity)”와 같은 개념들도 결국 그들이 생각하는 “문명국”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따라서 세계 인종 의회(Universal Race Congress)에서 듀 보이스(Du Bois)와 같은 사람들은 당시 논의에 얽힌 제국주의적 태도들을 비판했고, 인종 간의 평등한 관계라는 관점으로 국제주의를 해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주의 물결은 미야오카(Miyaoka)와 같은 외교관들로 인해 대륙을 건너 일본으로까지 전해지기도 했다. 즉, 국제주의는 기존의 소수 노동자 계급 및 사회주의자들만이 점유하던 개념에서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국가의 틀을 넘는 공통적 국제 기반에 대한 구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개념으로 재발명(reinvent) 되었다.
1차 세계대전과 ‘국제 정부’의 구상
1차 대전이 시작되고 국제주의와 국가 간 평화에 대한 사람들의 낙관은 조금 주춤했지만, 전쟁이 끝나고 국제주의는 정치적 기획의 차원에서 다시 한 번 중요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정치적 기획으로서 국제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구상되었다. 예를 들어, 국제 연방(union)에 대한 구상은 전쟁 이전부터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국제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유용한 방법으로 언급되었다. 이 구상은 1920년 국제연맹을 창설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지만, 여전히 식민지 문제에 관해서는 제국주의적 관점을 버리지 못한다. 또, 정치적 자결주의(political self-determination)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당시 국제연맹에서 활동하던 대표들은 국가적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자결주의를 지지했지만, 그들의 이념도 결코 제3세계 국가들의 독립을 받아들이진 못했다.
국제여성운동을 주도하던 페미니스트들도 당시 헤이그에서 진행된 다양한 정치적 논의들, 특히 국가 제재, 군축, 종교적 자유나 평등과 같은 주제들을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다뤘고, 이들 또한 내셔널리즘과 국제주의 간의 정치적 관계를 고민했다.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 국제 연맹(WILPF)과 같은 경우에도 사람들이 애국심을 잃지 않고 국제주의적 기구를 통해 국가의 민주적 평화를 이루는 균형 잡힌 접근을 추구했다. 국제주의 담론들은 당시 서구 유럽의 정치적 정서와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국내정치와 내셔널리즘을 기본 단위로 상정하며 진행된 논의들이 많았다. 버그선(Bergson)처럼 연합국에게만 국한된 국제연방을 만들자는 제안도 등장했고, 반대로 아예 독일을 포함시켜 자신들의 리그 아래로 끌어들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럼에도 전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해야 하는 시점에서 국제주의에 관한 논의는 확장성을 지녔고, 분명히 국가 경계선에 균열을 낸 지점이 있다. (국제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누가 대표인가? 누구를 지배할 것인가? 권력의 기반은 무엇일까? 어떤 권력을 갖는가? 기존의 국가 질서를 넘어선 상상력을 요구하는 질문들이 논의되었다. 국제주의와 주권 사이의 관계와 그 속에서 주권을 얼마나 희생 시킬 수 있는지, “문명국”의 기준은 무엇일지, 국제법은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을지 등과 같은 질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주의와 초국가주의의 사고방식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연구가 논의를 뒷받침 시켜주기도 했다. 즉, 국제주의를 둘러싼 논쟁들을 위해 당시 정치적 논쟁뿐만이 아니라 여러 과학적, 사회적 논쟁들이 동원되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당시 내셔널리즘과 국제주의 사이에 뚜렷한 선을 긋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결국 근대적 사회에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민주적 대표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 개념은 서로 불가분하게 얽혔다. 갈수록 국제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보이기 시작했고, 국제주의로 인해 오히려 국가 개념에 대한 논쟁, 토론, 혼란 등이 다양하게 떠올랐다. 특히 당시 사람들은 내셔널리즘 이후 진보하는 사회의 발달 단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는데, 그래서 국제주의 개념은 더 매력적으로 비춰지며 동시에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국제성에 대한 그들의 유연한 상상들도 당대에 만연했던 제국적, 인종적, 젠더적, 그리고 민족주의적 한계를 극복하며 나아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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