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미래 국제질서의 예측에 성공할 것인가?

최형화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저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새롭게 태동하는 국제정치 구도에서 갈등의 원인은 다름 아닌 ‘문명’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문명이라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키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따라서 각 문명이 하나의 일관된 정치적 실체를 형성할 것이며, 상이한 문명을 가진 집단들 사이에서 갈등이 나타나게 된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 곧 국제정치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과연 그럴 것인가? 냉전의 종식은 미소 두 진영 간의 이념적 갈등을 일단락 시키고 국제질서의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지만, 세계 주요 국가들 사이의 경제·정치적 이해의 충돌은 여전히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서로 다른 문명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우며, 새로운 세계에서 문화와 문명은 근본적 갈등의 근원이 아니다. 고로 헌팅턴은 미래 국제질서의 예측에 궁극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문명’(civilizations)이란 무엇인가?

‘문명’에 대해 헌팅턴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문명은 문화적 실체를 의미한다. 마을, 지역, 민족 그룹, 종교 그룹, 국가는 모두 서로 다른 수준의 이질성을 지닌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문명은 이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문화적 집단이며, 그것은 언어, 역사, 종교, 관습, 제도와 같은 객관적 요소와 사람들의 주관적인 정체성 인식에 의해 정의된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국제정치는 서구적 국면에서 벗어나 서구 문명권과 비서구 문명권 간의 상호작용이 그 중심이 된다. 문명의 정치에서 비서구 문명권의 국가는 더 이상 서구 식민주의의 대상으로 남아있지 않고, 역사를 이동하는 혹은 형성하는 행위자로서 국제정치에 합류한다. 

세계는 대체로 서양, 유교, 일본, 이슬람, 힌두교, 슬라브 정교회, 라틴 아메리카 및 아프리카 문명 등 주요 문명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미래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갈등은 이러한 문명을 서로 분리시키는 문화적 단층선을 따라 발생할 것이다. 문명의 충돌은 두 가지 수준에서 발생한다. 미시적 수준에서 문명 사이의 단층선을 따라 인접한 그룹들은 영토를 놓고 격렬한 분쟁을 일으킨다. 거시적 수준에서 서로 다른 문명의 국가들은 군사력과 경제력 분야에서 경쟁하고, 국제기구와 제3자의 통제권을 놓고 대립하며, 그들의 정치적, 종교적 가치를 경쟁적으로 홍보한다. 

헌팅턴은 미래에 국제정치의 가장 중요한 축은 서구 문명과 다른 문명 사이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특히 이슬람-유교 문명권이 서구 문명과 갈등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따라서 서구 문명은 마땅히 비서구 문명을 수용해야 할 것이며, 다른 문명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종교적, 철학적 가정과 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보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야 한다. 또한 각 문명은 다른 문명과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문명의 충돌, 무엇이 문제인가? 

헌팅턴은 국제정치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패러다임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 국제질서의 예측에는 궁극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필자는 그 근거를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제시한다. 첫째, 비서구에 대한 무지. “문명의 충돌”이 가장 강력한 뭇매를 맞았던 이유는 바로 헌팅턴의 서구중심적 시각이다. 서구중심적이라는 표현을 살짝 비틀어 놓으면 비서구에 대한 무지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서구의 입장에서 헌팅턴의 글을 읽으면 이것이 마냥 과장된 비판은 아니라는 것을 바로 납득할 수 있다. 특히 헌팅턴이 일컫는 비서구의 근대화가 서구화와 어떻게 구분되는지 상당히 모호하다. 또한 서구를 제외한 다른 문명권의 구분 기준 역시 무수히 많은 지적과 공격을 받은 바 있으니, 본문에서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다. 

둘째, 기술 발전에 대한 선구적 혜안의 결여. 헌팅턴이 처음으로 “문명의 충돌”을 “Foreign Affairs” 잡지에 기고했던 1993년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대립이라는 냉전적 국제질서가 붕괴를 맞이했던 시점이며, ‘문명 > 기술’이라는 부등식이 충분히 성립될 수 있었던 구조적 환경이었다. 미국의 자유주의 이념을 앞세운 화해의 조류 속에서 헌팅턴은 과감히 “No”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장 중요한 미래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고도의 기술 발전이다. 현재 국제관계의 흐름을 결정 짓는 중요한 변수는 문명보다는 기술이 아닐까 싶다. 기술의 발전은 종교, 정체성, 동질감 등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을 초월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할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기술패권경쟁 시대에 있다. 중국은 유교문명권의 ‘맹주’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경제 성장과 기술력의 발전으로 미국을 추격하는 상황임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이는 헌팅턴의 논의대로 중국이 가진 유교 문화의 가치가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맥락은 전혀 아니다. 굳이 한물간 개념들로 표현하자면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를 혼재하는 제3의 개념적 정의로 현재의 패권 경쟁을 해석해야 한다. 

셋째, 같은 문명 내의 갈등 상황에 대한 안일한 해석. 같은 문명권 안에서도 갈등은 발생하지만 서로 다른 문명권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보다는 덜 폭력적일 것이라는 헌팅턴의 주장은 현재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 아닐까 싶다. 헌팅턴에 의하면 “문화적으로 통합되어 있지만 이념적으로 갈라져 있던 민족이 다시 뭉치고, 이념이나 역사적 상황으로는 통합되어 있지만 이질적 문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사회는 다시 갈라지거나 극심한 긴장을 겪는다. 문화적으로 비슷한 나라들은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협력한다.” 헌팅턴의 안일한 주장에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분석하면 어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긴밀한 문화적, 민족적, 역사적 연결고리와 양국 국민의 동질감을 강조하면서, 동부 우크라이나의 정교권과 서부 우크라이나의 동방 가톨릭 사이의 문명 단층선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따라서 두 국가는 유혈 분쟁으로 치닫지 않는다고 예측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하다. 러시아 교회 산하에 있는 우크라이나 교회는 러시아 본교와 관계 단절을 선언하였고, 지난 1년 간 전쟁으로 인한 누적 사망자 통계를 살펴보면 양국 군인은 20만 명, 민간인은 8000명에 육박한다. 두 국가 간의 갈등 국면은 지속되고 있다. 

21세기 국제질서는 무엇을 기반으로 작동되는가? 

21세기 국제질서를 ‘말이 되게’ 해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토머스 쿤(Thomas Kuhn)은 하나의 패러다임이나 이론은 모든 정치적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쿤의 주장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북핵 문제, 중국-대만의 긴장관계를 똑같은 이론적 모델로 해석할 수 있다는 발상은 어쩌면 현실성 없는 야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폭력의 양상은 정치적 이익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정부 상태에서 국가들 간의 역학은 힘의 논리에 의해 작동된다는 전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심플하다 못해 단조로운 힘의 논리로 천라만상을 해석하기에는 역부족하다. 21세기 국제질서를 보다 정교하게 해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덕목에 대해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인류 역사의 축적에 대한 고민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맥락은 ‘역사’보다는 ‘축적’이다. 단순히 한 국가의 운명을 뒤흔들었던 중대한 역사 사건을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는 진부한 논의가 아니라 모든 순간의 역사적 맥락이 결집되어서 지금의 세계에 도래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컨대 현재의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과거의 중화질서, 근대의 제국주의, 냉전기 샌프란시스코 평화체제, 탈냉전기 강대국 패권 경쟁이 혼재된 복잡한 결과물이다. 동아시아의 현재를 바라봄에 있어서 그 어느 시기의 역사적 맥락도 홀시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축적을 통찰력 있게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국제질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유효한 방편이 아닐까 싶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고 아우를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정립은 역사의 축적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다. 

둘째,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이다. 글 전편을 통틀어 헌팅턴의 논의를 비판했지만 글의 말미에서는 그의 도전정신에 박수를 보내고자 한다. 이는 양심적인 가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문제를 추가로 꼬집기 위해서다. 국제정치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은 여전히 미국 학계를 축으로 돌아가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훌륭한 학자가 없어서가 아니다. 연구 인프라와 같은 구조적 변수를 배제하고 보다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보면, 서구 학계와 비서구 학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비판과 도전정신을 대하는 학풍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정신을 찬양하는 학풍은 수많은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미국 학계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용감한 액션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연구의 지적 완성도는 용감한 액션의 기본 옵션이다. 헌팅턴과 유사한(?) 케이스로 미어샤이머 역시 스스로 많은 논란을 자처하고 있지만, 학계에서의 입지는 아무도 저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미래 국제질서에 대한 예측은 실패할지라도, 거대한 패러다임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을 창출해낸 헌팅턴은 거장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참고문헌

Huntington, S. P. (1996).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 / Samuel P. Huntington. New York: Simon & Schuster.

Huntington, Ajami, Mahbubani, Bartley, Liu, Kirkpatrick, … Piel, Gerard. (1996). The clash of civilizations? : the debate. New York: Foreign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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