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ong Eun Lee
약 8년 전, 박사 입학 첫 주차에 저는 박사과정의 삶과 연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오리엔테이션 날에 만났던 박사과정 선배님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박사생은 이 힘든 과정을 선택할 만큼 순진해야 하며, 이 힘든 과정을 이겨낼 만큼 고집스러워야 한다.” 되돌아보니, 선배님의 말씀대로 순진함과 고집이 필요했던 순간들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두 번째는 같은 날, 프로그램 디렉터께서 설명해주셨던 박사과정과 석사과정의 차이점입니다. “학부생과 석사생은 지식의 소비자로서 교육을 받습니다. 하지만 박사생은 지식의 생산자로서 트레이닝을 받아야 합니다.” 박사과정 8년 동안 저는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학문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다양한 학교에서 다양한 특징의 박사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메리칸 대학 국제관계대학(the American University School of International Service (AU SIS))의 박사과정 경험을 기반으로 미국에서의 박사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관습과 현실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경험한 박사과정은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수업 기간, 연구제안서 기간, 그리고 학위논문 기간 입니다. 지금부터 각 단계에서 제가 겪었던 것들을 공유하겠습니다.
첫 단계: 수업 기간
수업 기간은 통상적으로 박사과정 첫 2년을 지칭합니다. 박사과정생은 정규 수업을 듣고, 양적, 질적방법론 훈련을 받으며, 학문 분야에 있어서 근간이 되는 연구들을 숙지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 단계에서 박사생의 학문적 삶은 주어진 리딩을 읽고, 과제를 완성하고, 연구논문을 작성하고, 기말시험을 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석사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사생들과 몇몇 수업을 같이 듣기도 합니다. 다만 석사과정과의 차별점은 더 많은 리딩과 과제가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박사과정 첫 단계인 수업 기간이 끝날 즈음에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자격시험은 제가 지금까지 치렀던 모든 시험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SIS는 박사과정 1년 차, 그리고 2년 차에 총 두 번의 자격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각 시험은 예년에 수강했던 수업들과 맞닿아 있는 지식에 대해 취급합니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우리는 수업 때 할당된 리딩들을 잘 정리해서 주어진 시간 내에 설득력 있는 에세이 답변을 제출해야 합니다. 저는 운 좋게도 박사생 동기들과 함께 리딩을 정리하고 자격시험 준비를 했기 때문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격시험을 앞두고 있는 박사생분들께는 동기들과 함께 준비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두 번째 단계: 연구제안서 기간
연구제안서 기간은 박사과정생이 자격시험을 통과한 다음 시작됩니다. 이 기간 동안 박사학위논문 연구제안서를 성공적으로 발표하고 나면 박사후보생(요구되는 모든 수업과 연구제안서를 통과한 후 박사학위논문만 졸업 요건으로 남겨놓은 상태—ABD (all but dissertation)이 됩니다. 박사후보생은 더 이상 정규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지만, 연구제안서 작성을 위해 개설된 고급방법론 수업들은 자유롭게 들을 수 있습니다. 연구제안서 기간은 1년에서 2년 정도 지속됩니다. 이때부터 외로운 박사생활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몇 동기들이 먼저 연구제안서를 발표하기 때문에, 아직 연구제안서를 발표하지 못한 박사후보생들의 심리적 압박감은 매우 커집니다.
연구제안서가 성공적으로 통과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과제를 완성해야 합니다. 첫 번째 과제는 심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심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식은 학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어떤 학교는 박사과정 1년 차부터 지도교수님을 미리 배정받지만, 저 같은 경우는 교수님들께 일일이 요청을 드려 스스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했습니다. 심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세웠습니다. 첫째, 각각의 심사위원들이 내 연구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둘째, 심사위원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토론할 수 있는가? 셋째, 심사위원장이 위원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한 편의 학위논문을 완성도 있게 작성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심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심사위원들에게 기대하는 바를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두 번째 과제는 ‘퍼즐’을 찾는 것 입니다. 혁신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특정한 정치사회 현상이 있는가? 현재 학계에서 자주 활용되는 이론적 설명들 사이에 어떤 ‘틈’이 존재하는가? ‘퍼즐’에 대한 해답을 찾은 학위논문은 새롭게 창조된 지식으로 인정 받을 것이며, 성공적으로 연구제안서 단계를 통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퍼즐’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나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데이터를 모으는 것 자체가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 연구질문을 찾아내고 연구설계를 준비하는 데 약 1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지막 단계: 학위논문 기간
학위논문 기간은 연구계획서를 성공적으로 발표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불행하게도 마지막 단계의 마감일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빨리 학위논문을 완성하는지는 온전히 연구자의 끈기와 운에 달려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논문 작성에 필요한 현장 답사를 연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학위논문 기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박사과정 공부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저는 박사생활 동안에 국제관계 분야의 전문가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전문 지식과 기량을 충분히 연마할 수 있었기 때문에 8년 전 내린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박사과정 공부는 과연 가치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본인이 선택한 학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거나 되어야 할 때만 가치가 있다”고 답변하고 싶습니다. 석사과정은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새로운 지식을 빠르게 흡수하고 마칠 수 있지만, 박사과정은 5년에서 10년으로 지연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박사과정에 지원하고자 하시는 분들께서는 학문의 ‘마라톤’을 시작하기 전에 본인이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의 가치를 반드시 고려해보기를 권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신조를 말씀드리자면 박사과정을 거쳐서 창출되는 지식의 가치는 지식을 획득하는 연구자의 역량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의 용도에 의해 부여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회과학은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우리가 창조하는 지식은 인간, 그리고 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믿습니다. 박사과정 공부는 본인이 축적한 지식을 활용하여 후배들을 양성하고, 고등교육에 이바지하고,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온전히 개인주의적인 의도에서 지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하고자 하는 분들께는 더 적은 시간과 비용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충고를 드리면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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